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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작/유스티티아 엘레지 & 비올라 세레나데

코르둘라와 능소화 1




굽은 허리를 도무지 펼 수가 없다.
책상에 한쪽 뺨을 댄 채로 억지로 연필을 굴려보지만, 나중에 수정하자 타협한 한편으로 거의 새로 써야 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감은 스스로도 자각한 바이다. 마감이 사흘 후였던가…….
부지런한 동기는 이틀 전에 과제를 마쳤으며 포기한 이들은 아예 일 년 더 수학하자며 뛰쳐나가 버렸다.
레지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중간 즈음에서 졸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머리를 식혀야겠어.'

도서관은 장서 보관에 최적화된 장소지 건강에 유익한 곳은 아니다. 레지나는 무거운 머리를 붙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휴일이라 학교 안은 한산했다. 도서관이나 집에 틀어박혀 과제에 몰두하거나, 그녀처럼 정신의 한계를 맞은 사람들 몇몇이 나무 그늘 아래서 반쯤 입을 벌리고 있을 뿐. 플라타너스 길은 텅텅 빈 채 한가로운 지빠귀만 울어댄다. 덤불에선 참새인지 뱁새인지 모를 놈들이 부지런히 바스락거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연못가로 향했다. 잉어가 보고 싶었다. 활자가 아니라면 무어든 좋단 심정이었고 풀떼기나 부산한 새떼보다야 알록달록한 잉어가 낫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연못엔 선객이 있었다.

화사한 금발을 늘어트린 사내가 수심에 잠긴 얼굴로 물속을 응시하는 중이다. 잉어 모이를 노리는 비둘기가 주변을 맴돌고, 교수동의 공작은 아예 접시에 부리를 처박았다.

'엮이지 말아야지.'

레지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걸음을 돌렸다. 현명한 판단에 운은 따르지 않았다. 남자가 푸른 눈을 들고 말을 건 것이다.

"레지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휴일인데 학교엔 무슨 일로?"
"도서관에……."
"과제? 도와줄까?"

친절한 제안이었으나 거절했다. 오랜 휴학으로 인해 남자는 아직 2학년이었다. 과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리가.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사실 과제를 제외하고도 그에게 무언가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레지나는 그의 정수리 부근을 올려다보며 곱씹었다. 세 살 많은 시빌라, 올로디아의 영주 엘레티르는 학술원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유명인사였다. 그와 레지나는 살아온 환경이 달랐으며, 학번, 학년, 특기 분야까지 거의 공통점이 없었다.

엘레티르는 머쓱한 얼굴로 눈을 떨어트렸다.

"그래도 혹시……, 바쁘지 않다면 잠시 앉았다 가지 않겠어?"

단순한 권유라 여기고 뿌리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던 터라 레지나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공연히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엔 껄끄러운 상대인 데다, 무언가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엘레티르는 레지나가 옆에 앉고 나서도 한참 우물쭈물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쪽은 한가한가 보지?'

팔자가 좋다고 할까. 레지나는 반반한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처지가 다른 건 알고 있었지만 자각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는 않다.

시빌라이고 영주, 평생 배곯을 걱정 없는 그와 달리 저는……. 그녀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국왕은 그녀를 미워했다.
미움이란 말은 퍽 온건한 표현이다. 로위나의 잿빛 눈엔 언제나 증오에 한 발 가까운 실망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품어 낳은 자식이 시빌라가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레지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하긴,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국왕이 땅을 떼어주거나, 재산이라도 한몫 챙겨줄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이상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해야 한다. 부친의 유산도 간신히 학비를 충당할 정도인 만큼 서둘러 졸업하고 직업을 구해야 했다. 그녀에겐 시빌라 엘레티르와 같이 태평하게 굴 시간이 없었다.

"선배님, 전 이만……"
"레지나, 실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유감스러움을 감추고 착석했다. 영원히 망설이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레지나는 말없이 중얼거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예. 질문이요?"
"응……."

엘레티르는 미미하게 붉어진 뺨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떨어트리고 이어갔다.

"그, 네 어머님……, 께서, 다음 달에 연회를 여실 예정인데 혹시 어떤 꽃을 좋아하실지 알 수 있을까. 선호하시는 보석도……"
"꽃……, 이요?"
"그리고 보석."

레지나는 더 이상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마치…… 로위나에게 '선물'을 하려는 듯 굴고 있었다. 진상품이라면 저와 상의할 리가.

"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엘레티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아름다운 낯엔 여전히 홍조가 가시지 않았고 새파란 눈이 흔들리는 광경에 열에 구는 마음이 흔들렸겠지만, 레지나는 남은 하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시빌라 엘레티르, 왕궁의 정원을 보신 적 있습니까?"
"당연히……?"
"온실은요? 저도 열 살 때까진 그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확히는, 열 살 이후론 궁에서 내쳐졌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장미와 작약이 피죠."
"그……"
"청조의 방은 청금석 도료를 아낌없이 바른 것으로 유명하고요. 시빌라 아르카께서 아끼는 호박방의 이야기도 당연 들어보셨을 겁니다."

엘레티르는 숫제 침울해졌다. 레지나는 그의 마음을 다독이는 대신 냉정하게 일렀다.

"진상품이라면 성의만 보이면 됩니다."

진짜 이유는 꺼내지 말라는 듯 쏘아붙였건만 엘레티르는 기어코 내뱉었다.

"나는 그분께 선물을 드리고 싶은 거야."

파르르 떠는 속눈썹 끝에 맺힌 울적함이, 영락없이 연심이라……. 레지나는 그만 구역질이 났다.

"선배…… 등신입니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썩 훌륭하지 않았으나 토사물에 비하면 이편이 나았다.

"지금 그분에게, 꼭 사랑이라도 느낀 듯……"
"그러면 안 돼?"
"아."

탄식하며 머리를 짚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시빌라는 목숨에 여분이라도 가지고 태어납니까?"
"그렇진 않은데……"
"그러면 어찌, 어떻게 국왕 폐하를 연모할 수 있지요?"

레지나는 인류애와 동문의 의리를 끌어모았다.
눈앞의 남자가 인생을 망치든 말든 알 바는 아니지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엘레티르는 억울한 양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폐하께선 상냥한 분이셔. 1월에 인사를 올릴 때도 격려해 주셨는걸……."
"그건 선배가 올로디아의 영주이기 때문이겠죠. 그분은 정을 모르십니다. 처형식을 구경한 적 없나 보군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제가 그분의 자식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압니다. 시빌라 아르카의 몸엔 더운 피가 흐르지 않고, 심장은 살점도 온기도 없는 쇳덩이지요. 선배도 괜한 일 마시고 학업에나 신경을 쓰는 것이 어떠합니까."

엘레티르는 퍽 상처받은 얼굴이었으나 레지나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상심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마지막 말만 아니었다면 남자의 존재 따위 깨끗하게 씻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사랑해."

순진한 눈 안엔 색채와는 다른 온도가 가득했다. 이 계절을 닮은 어리석음이다.

"……진심이 무언가를 바꿀 수도 있잖아."

그 말이 어찌나 같잖던지. 머리 가득 조소를 채워 넣고 마저 나아갔으나 가슴 속의 균열은 태연하질 못했다. 레지나는 급소를 붙잡힌 사람처럼 불안을 끌어안았다.

진심이라.

그러니까…… 사랑이 왕을 바꿀 것이라. 그는 감히 자신했다.

심장에 피가 돌기 때문에 레지나 역시 감상에 사로잡혔다. 오만이 역겨웠고, 의심이 싹트고, 흔들림은 생각을 옛 자리로 끌어갔다. 그깟 사랑이 무어냐 짓씹어도 어머니의 냉대는 변치 않는 사실이며 기억 역시 가벼이 씻기지 않는다. 가정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의지를 거스른 물음이 주어졌다.

기회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비참한 일이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릴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굴욕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이제 와서 어머니 품의 온기 따위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레지나는 고개를 크게 젓고 나아갔다. 타인의 죄를 헤아리기엔 저 역시 분주한 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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